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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만 명. 2013년 개봉 당시 이 숫자를 보고 저도 처음엔 그냥 흥행작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영화 <변호인>은 1980년대 실제 발생한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돈과 명예를 쥔 변호사가 모두가 피하는 사건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장면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천만 관객을 만든 줄거리, 핵심만 짚는다
영화는 1980년대 초 부산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은 고졸 출신으로 사법시험을 통과한 인물입니다. 판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당시 다른 변호사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부동산 등기나 세무 자문 같은 영역을 파고들어 엄청난 수익을 올립니다. 대기업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을 만큼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시 공부 시절 외상으로 밥을 먹게 해준 국밥집 아주머니 순애(김영애 분)의 아들 진우(임시완 분)가 영장도 없이 연행되어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용공 분자'라는 혐의였습니다. 용공(用共)이란 공산주의 세력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반체제 인사를 탄압할 때 즐겨 쓰던 낙인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아무 근거 없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면회를 따라간 송우석은 온몸이 피멍으로 뒤덮이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진우를 목격합니다.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분노보다 먼저 서늘함이었습니다. 저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더 무서웠습니다. 결국 송우석은 안락한 삶을 내려놓고 국가를 상대로 한 외로운 법정 싸움에 뛰어듭니다.
- 개봉: 2013년 12월 18일 / 감독: 양우석 / 상영시간: 127분
- 출연: 송강호, 김영애, 임시완, 곽도원, 오달수
- 최종 관객 수: 약 1,137만 명 (역대 박스오피스 상위권 기록)
부림사건, 영화보다 더 잔혹했던 실화
영화의 뼈대가 된 부림사건(釜林事件)은 1981년 9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 시절 실제로 일어난 공안 조작 사건입니다. 부림이라는 명칭은 부산의 학림 사건에서 따온 것으로, 서울의 학림사건과 맥을 같이하는 탄압 구조였습니다. 제가 이 배경을 찾아보고 나서야 영화 속 장면들이 단순한 연출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당시 공안 당국은 사회과학 독서 모임에 참여했거나 야학에서 노동자를 가르치던 대학생, 교사, 직장인 등 22명을 영장 없이 불법 체포했습니다. 불법 구금(不法拘禁)이란 법원의 영장 없이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로, 헌법이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중대한 인권침해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이 공개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 어렵습니다.
체포된 이들은 대공분실이라는 밀폐 공간에 최장 두 달 가까이 감금되었습니다. 대공분실(對共分室)이란 공산주의 관련 사건을 다루는 정보기관의 조사실로,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비공개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통닭구이 고문, 물고문, 수면 박탈 같은 방식으로 허위 자백을 강제로 받아냈습니다. <전태일 평전>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킨 것입니다(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이 시점에 부산에서 세무 변호사로 활동하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동료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호인단에 합류하게 됩니다. 발톱이 빠지고 온몸이 망가진 청년들을 접견한 그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법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었다고 직접 회고했습니다. 그 경험이 이후 그의 인생 경로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33년 만의 무죄판결, 정의는 늦었지만 왔다
1982년 당시 법원은 피해자들에게 징역 1년에서 7년의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 자백을 그대로 증거로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사법부가 정권의 압박 아래 독립성을 잃었다는 것, 그게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저는 지금도 답답합니다.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2014년 2월, 부산지방법원은 부림사건 핵심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再審) 재판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심이란 이미 확정된 판결에 중대한 오류가 있을 때 다시 재판을 여는 절차로, 억울한 판결을 바로잡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같은 해 11월 대법원에서 무죄 원심이 최종 확정되면서, 사건 발생 33년 만에 피해자들은 공식적으로 누명을 벗었습니다(출처: 대법원).
재판부는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진술은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법원이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공식 인정한 셈입니다. 영화 <변호인>이 개봉하며 사회적 공론화가 이루어진 직후 무죄 선고가 나왔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영화 한 편이 33년간 닫혀 있던 문을 여는 데 일조한 것입니다.
솔직히 이 결말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처음 봤을 때와 완전히 다른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법정 장면에서 송우석이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실제로 33년 동안 억울함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게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송우석 같은 사람이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이 이겁니다. 지금 이 시대에, 본인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려운 사건이 생기면 증언을 피하고, 불편한 자리엔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게 더 익숙한 세상이 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송우석이 이 사건을 맡은 동기는 거창한 이념이나 정의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밥을 외상으로 먹게 해준 아주머니에 대한 의리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단순한 이유로 움직이는 사람이 오히려 더 끝까지 가더라고요. 계산이 없으니까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 장면이 저한테는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법률 개념 중 하나가 적법절차(適法節次)입니다. 적법절차란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때 반드시 법이 정한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원칙으로, 민주주의 사법 시스템의 핵심 가치입니다. 영화 속 공안 당국이 영장도 없이 사람을 잡아가고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낸 행위는 이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송우석은 법정에서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본 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아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단순히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모두가 회피하는 시대에, 한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 그걸 송우석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줬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역사 공부나 영화 감상이라는 틀을 걷어내고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로 보시길 권합니다. 화려한 액션도 없고 반전도 없지만, 법정에서 송우석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화면에 빨려 들어가 있을 겁니다. 보고 나서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남는 영화, 그게 이 작품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